나는 베이비부머 시대에 태어나 운 좋게 대학을 나왔고 취업도 쉽게 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지만 여자는 직장을 가지고 있어야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엄마의 신념 덕분에 나는 면허증을 가진 간호사가 되었다. 나의 직장은 도시 변두리에 자리 잡은 정신병원이었다. 내가 정신과를 선택한 것은 알콜중독이었던 아버지와 내가 가진 정신과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결혼은 아버지가 제공해준 끔찍한 지옥 같은 가정환경 덕분에 탈출하는 마음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뒤에 서둘러서 하게 되었다. 나만의 아기자기한 예쁜 가정을 꾸리고 싶은 급한 마음이 작동한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다. 가부장적이면서 알코올 문제가 있던 시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이다. 친정아버지를 피해 결혼이라는 수단을 사용했지만 결국 나의 종착지는 또 다른 알코올중독자였다.
그때부터 남편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 슬슬 싸우기 시작했다. 남편을 너무 사랑한 시부모님과 나는 남편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나에게 엄청난 족쇄가 되어 나를 옥죄어 나의 손과 발은 성한 날이 없었다. 나는 시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적군과 아군은 명확해졌고 남편은 늘 중립국이었다. 몇 년간 피터지게 싸웠지만 싸움의 결말은 쉽게 나지 않았다. 마치 지금 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말이다. 남편은 이 전쟁이 빨리 끝나서 평화가 찾아오길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정전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나는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 출근을 하면 머리가 아프지 않았지만 주말에 집에만 있으면 엄청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사람들은 내가 워크홀릭이라 그런 것이라며 일을 줄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두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병원에 출근해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정환경 덕분에 승진도 빨리 하게 되었다.
승진을 하면 할수록 나는 아픈 곳이 많아졌다. 이제는 목과 어깨가 너무 아팠다. 베개를 잘못 사용해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 베개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집안에 온갖 종류의 베개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떠한 베개를 베고 자도 통증은 사라지질 않았고 점점 더 강도가 높아졌다. 결국 베개가 아닌 침대 매트리스가 문제라는 생각에 봉착하게 되었고 나는 최고급의 매트리스로 바꾸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통증을 가시질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스무고개를 하듯 나에게 있는 문제들을 되짚어 보면서 내가 가진 질병을 유추해 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끝내 나는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 수 없었고 그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30대 초반에 승진을 해서 나는 과장이 되었다. 승진을 했으면 일을 더 잘해야 하는데 나는 출근을 해서 멍하게 앉아 있다가 퇴근을 했다. 일을 할 수 없었다. 집중력, 기억력, 의욕, 즐거움, 행복감, 기쁨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아침에 겨우 일어나 출근하는 일뿐이었다. 세상이 흑백사진처럼 보였고 늘 뿌연 안갯속에 내가 서 있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어지럽기 시작했다. 누워있어도 어지러웠다. 왼쪽으로 눕고 오른쪽으로 눕고 똑바로 누워도 어지러운 것은 매 한 가지였다. 무섭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무슨 불치병에라도 걸렸나 싶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겨우 진정시키고 병원에 도착했고 또 멍하기 앉아있으니 병원장님이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뇌사진을 찍어보길 권하셨고 추천받은 병원으로 향했다. 뇌 CT를 찍으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만약 뇌종양이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너무 힘드니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뇌사진의 결과 나의 뇌는 멀쩡한 상태였다. 뇌의 문제가 아니라면 결국 정신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내가 근무하던 병원의 원장님이 진료실로 불러 우울증약을 처방해 주셨다. 나는 내가 왜 우울증 약을 먹어야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우울증인가요?"라고 물었다.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이 우울증 인지도 모르는 간호사가 어디 있냐"며 핀잔을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약을 먹으면서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에서 보던 우울증 증상과 내가 겪은 우울증은 달랐다. 정신과 책에 있는 우울증의 진단기준은 너무 간단했지만 나의 우울증 증상은 아주 심오했고 그 어떤 책에서도 나와 유사한 이야기는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뷰트도 없었고 인터넷을 그렇게 활발하게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라 더더욱 그랬다. 지금은 아무리 봐도 나는 우울증 환자다. 그리고 내 주변에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하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도 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우울증이 왔음에도 그것이 우울증인지 모르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서이다.
나는 20년째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즉 우울증 약을 지속적으로 먹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 번 우울증 약을 먹으로 죽을 때까지 먹어야 되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우울증 치료를 빨리 할수록 약을 먹는 기간이 줄어든다. 그러니 지금 당장 병원을 찾아서 진료를 받는다면 6개월만 복용하고 약을 끊어도 되는 환자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랜 기간 우울증을 방치했고 증상이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던 시기에 치료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도 약을 먹고 있는 것이다.
티스토리를 통해서 내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독자들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단 한사람이라도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텨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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